...52
 
 

 

 

   
 
 
  
 

류가 처음 동(銅)을 발견한 것은 기원전 6천년 경입니다. 서아시아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스멜리아인과 칼텔리아인들이 당시 지표에 노출되어 있는 동광석에서 동(銅)을 채취하는 기술을 알아내어 각종 기물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른바 동기시대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는 왜 하필이면 동(銅)을 먼저 발견할 것인가? 전문가들은 동(銅)이 쉽게 녹는 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제련법이 가장 손쉬운 금속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동기시대의 유물은 이집트,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등의 유적에서도 발견되며 이후 동(銅)에 주석을 합금시켜 만든 청동이 만들어져 인류는 청동기시대라는 문명발달의 한 시대를 맞습니다.
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경주, 광주, 진주 등 국립박물관의 소장품은 석기시대 문화를 대표하는 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유물 및 철기시대의 유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유독 많은 것이 청동기 시대의 유물입니다 .
 

 


기시대는 대략 BC 300년 부터 AD 원년까지의 300년간이라고 하며, 청동기시대는 그 이전인 BC3,000년 부터 BC500년까지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즉, 철기시대의 유물은 약 2천년전, 오래 되었어야 2천 3백년을 넘지 못하지만 청동기 유물은 적어도 약3천년 이상은 되었다는 계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기시대의 유물은 별로 없고 있어도 심히 부식되어 원형을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청동기 유물은 동(銅)이라는 금속이 얼마나 오래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청동기 유물은 푸른 녹만 살짝 긁어내면 아직도 생생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것입니다. 실로 동(銅)이라는 금속은 신비한 것입니다.

이야기 하나 - 놋그릇
 
 
겨울을 앞두고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앉아 깨진 기왓장을 간 가루로 놋그릇을 닦는 일은 예전 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과거 동절기 동안의 식기로 일반적이었던 놋그릇을 60년대 스테인레스 식기가 등장하면서 그 생명을 다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즈음 고풍스레 치장한 한식전문 음식점에서 과거 놋그릇을 연상시키는 식기가 새로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통의 복귀현상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이 그릇은 과거의 놋쇠를 틀에 부어 만든 일반적인 주물 놋그릇이 아니라 방짜유기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품질이 좋은 놋쇠를 부어 내서 다시 두드려 만든 그릇'이라는 방짜유기는 오늘날 새로운 호황을 맞고 있습니다.
 
납이나 아연 따위의 다른 금속이 완전히 걸러지지 못한 주물놋쇠와 달리 방짜유기는 놋쇠를 망치로 두드려 만들기 때문에 이러한 금속이 거의 들어있지 않아 주기적으로 닦을 필요가 없다는 데서 가치를 지닙니다. 비단 고급 전통유기라는 점에서 방짜유기의 명성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현대생활의 여러 부분에서 필요한 용품 또는 도구로 쓰여지는 데 의의를 가집니다.
 
기는(놋그릇) 벌레가 근접을 못하여 썩질 않고 살균작용을 하며 평생을 써도 녹슬지 않습니다. 광택이 수백년 가고 무공해로 인체에 해가 없어 우리 선조들은 오래 전부터 사용해 왔습니다. 우리 나라의 금속문화는 지금부터 약 3천년 전, 청동기 문화가 뿌리를 이루고, 삼국 시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놋쇠로 많은 일용품을 만들었습니다. 합금 기술도 발달하여 용도에 맞는 우수한 놋쇠를 다루었습니다.  
 

기는 현재 다음 공정을 거쳐 완성됩니다. 현재의 기계화된 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전래의 전통방법은 비교되어 기술되었습니다.

① 가장 우선된 일은 놋쇠의 재료인 주석과 구리를 혼합하는 것으로 주석과 구리를 28% 대 72%의 비율로 섞습니다.
② 혼합된 주석과 구리는 용광로에서 섭씨 1600도의 온도로 끓입니다. 과거에는 숯을 재료로 하고 풍구를 바람 내는 도구로 이용하여 불을 땠으나 현재는 기름과 동력을 이용해서 바람을 내어 원료를 끓입니다. 놋쇠를 끓이는 용광로는 흙 도가니로서 현재 국산과 독일 산이 있는데 국산은 10번 정도 사용하면 폐기해야 하지만 독일산은 그 다섯 배정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독일 산이 선호되기도 합니다.
③ 끓고 있는 놋쇳물을 긴 손잡이에 연결한 바가지로 퍼내어 틀에 부어냅니다. 이는 제품의 형태가 아니라 다음 공정에서 두드려 내기 위한 기본모형으로써 놋쇳물을 부을 때의 양은 어림짐작으로 하지만 오랜 경험에서 나온 감각으로 대부분 정확합니다. 예컨대 꽹과리의 경우 약 500g을, 징의 경우 약 4.2 Kg정도를 붓는데 숙련공의 경우 거의 일정하게 부어냅니다. 이 작업의 경우 또 다른 어려움은 섭씨 천도 이상의 용광로 옆에서 쇳물을 떠내고 붓는 작업을 해야되기 때문에 열을 이길 수 있는 체질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놋쇳물을 틀에 붓기 전에 함께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틀에 기름을 바릅니다. 과거에는 돼지비계를 사용했으나 지금은 식용 돼지기름인 쇼팅을 이용합니다. 놋쇳물을 틀 속에 부을 때 부어진 놋쇳물이 굳는 순간 그 위에 톱밥을 뿌리는 한 사람의 보조원이 있습니다. 이는 쇳물이 굳을 때 응축성을 높이는 효과를 냅니다. 특히 악기의 경우 이 과정을 거침으로써 제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합니다.
④ 다음은 틀에서 굳은 놋쇠를 때리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현재는 기계작동에 의한 자동 망치질로 작업이 진행되지만 과거에는 사람이 망치로 직접 때려서 작업을 했습니다. 망치로 때리는 작업은 '초밧대기 때리는 작업'과 '도듬질'로 나뉩니다. '초밧대기 때리기' 일은 초벌작업에 해당하고, 본격적인 망치질은 도듬질입니다. 도듬질로 놋쇠를 얇게 만들어 원하는 제품의 형태를 잡아냅니다. 이북말로는 '우김질'이라고 하는 도듬질은 세 사람의 망치 잡이와 집게 잡이 그리고 풍구 잡이의 분업으로 이뤄집니다. 세 명의 망치 잡이는 '쇳매', '전매'와 '앞매'라는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집니다. 쇳매는 세 개의 망치 중 가장 큰 망치를 잡고 때리는 망치 잡이로 보통 힘센 사람이 담당하고, 앞매는 셋 중 가장 기술이 출중한 사람이 됩니다. 도듬질할 때는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망치질을 하기에 '딩.동.댕'소리가 나며, 시간이 갈수록 놋쇠가 얇아지고 망치질도 빨라지기 때문에 소리가 요란해진다고 합니다.
집게 잡이는 '대정'이라고 부르며 망치로 두드리는 동안 놋쇠를 집게로 잡고 있으며 그것이 식으면 숯불에 넣어서 달궈 다시 꺼내 잡는 일을 반복합니다. 풍구 잡이는 '가짓대정' 이라고도 하며 숯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풍구작업을 담당합니다. 망치질은 놋쇠가 잘 식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품을 세 개씩 겹쳐 한꺼번에 하게 됩니다.
⑤ 망치질의 다음 작업은 '다듬질'입니다. 여기서는 어느 정도 형태가 나온 것을 완전한 '모양'으로 잡아주는 작업을 합니다. 다시 말해 마무리작업으로서 제품을 곱게 다듬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 일은 대개 기술이 좋은 '앞매'가 담당하게 됩니다.

남동 놋점 마을은 예전에 놋그릇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20여 가구 중 지금은 겨우 한 곳만 놋쇠를 다룹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경주민속공예촌에 '동협유기공방'이 있어, 전통적인 최고의 방짜 놋쇠를 직접 합금하여 다양한 유기와 장식품을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미국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의 한국실에 놋그릇이 전시돼 있습니다. 고려 청자기, 조선 백자기, 금속 활자와 함께 말입니다. 그 만큼 우리 나라의 놋그릇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식기입니다.
문화의 세계화는 우리 문화를 바로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점은 이제 소수 몇 사람의 소리 없는 메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기말이래 지금까지 지속되는 무분별한 문화 혼돈기를 벗어나는 노력은 21세기를 눈앞에 둔 우리 세대의 시대적 과제로 모두가 인식하여야 합니다. 우리 것에서 뿌리내려진 진정한 문화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쇼비니스트의 자기만족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라도 놋 식기 한 벌이라도 사용해 봄이 어떻겠는지요?

 
은은한 금빛 놋주발에 밥 담고 놋대접에 국 퍼담아 얹은 상둘레엔 정감 있고,
정겹고 훈훈함이 감도리라!
 
이야기 둘 - 질병을 치료하는 동(銅)
이미 기원전 2천년 이전에 고대 이집트인들이 화농창상의 치료와 음료수의 살균에 동광석을 사용한 이래 동(銅)은 출혈, 염증, 궤양, 빈혈, 간질, 관절 류마티즘 등 갖가지 병에 치료하는데 사용되어 왔습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약학서인 '본초강목'도 동(銅)이 약으로서 우수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銅)이 빈혈, 위황병 등의 예방과 치료에 사용되고 있는 것은 동(銅)이 혈액이 만들어지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또, 동(銅)을 캐내는 광부들에게는 관절염이 현저히 적었다는 역학적관찰이 보고 되었으며 류마티즘열, 좌골신경통 등에도 동(銅)이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동(銅)의 항균작용은 오래 전에 밝혀진 것으로서 장티푸스, 임질과 트라코마의 치료에 쓰이며 악성 종양과 암의 억제작용을 한다는 보고 예가 있어 현재 이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야기 셋 - 구리 세숫대야를 쓰면 눈병에 안 걸리는 이유?
구리 세숫대야를 쓰면 눈병에 안 걸리는 이유는 예로부터 여행자들은 하천물을 동전이나 은화로 살균 소독하여 마셨으며 또 구리 세숫대야를 쓰면 눈병이 예방된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이 신비스런 현상의 원인은 동이온의 미량금속작용에 의해 물이 항상 살균 정화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동경도립위생연구소는 NHK-TV가 방영하는 가운데 이에 관한 실험을 하여 동(銅)의 미량금속작용을 입증한바 있습니다. 미량금속작용은 특히 동(銅), 은, 수은이 강하게 작용하여 극히 미세한양으로도 놀랄만한 살균작용을 보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상수도 취수원을 살균 정화시킬 때 황산동을 사용하고 있으며 의료기구에 동(銅)이 쓰이는 것이나, 동(銅)으로 만든 구두 깔판, 양말도 같은 원리를 이용한 예입니다.

 
이야기 넷 - 성덕대왕 신종 , 에밀레종(국보 제29호)
신라 경덕왕은 부왕인 성덕왕의 위업을 추앙하기 위하여 구리 12만 근을 들여 이 대종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아들 혜공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동왕 7년(771)에 이 종을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하였습니다. 이 종은 처음 봉덕사에 받들어 달았으므로 봉덕사종이라고 하며, 종을 부을 때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이 있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왔습니다. 봉덕사가 폐사된 뒤 영묘사로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1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 구박물관으로 옮겼으며, 박물관이 이곳으로 신축 이전하게 되어 1975년 5월 26일에 이 종각으로 옮겨 달았습니다. 종의 입둘레는 팔능형이고 종머리에는 용머리와 음관이 있습니다. 특히 음관은 우리 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서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한다고 합니다. 종 몸체 상하에는 견대와 구대가 있고 견대 밑 네곳에 유곽이 있고 유곽 안에 9개의 유두가 있습니다. 몸체의 좌우에는 이 신종의 내력을 적은 양주 명문이 있으며 앞뒤에는 두 개의 당좌가 있고, 유곽 및 네 곳에는 구름을 타고 연화좌에 앉아 향로를 받는 공양천인상이 천의 자락을 휘날리고 있습니다. 산과 같이 크고 우람하나 조화와 균형이 알맞고 종소리 또한 맑고 거룩하여 그 긴 여운은 은은하게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에밀레종 : 높이 3.75m , 입지름 2,27m , 두께 25-11cm , 무게 약 25톤